I.
까만 아메리카노에서 하얀 커피 향이 올라온다. 컵을 쥐어보니 따스하다. 혈액순환이 잘 안되어서 날씨가 조금만 추워지면 내 손은 항상 차가워진다. 따스한 컵을 쥐니 온기가 손을 타고 올라온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속이 곧 훈훈해진다. 그래도 손은 아직도 차갑다. 나는 컵을 감싸 쥐고, 출입구 쪽을 바라본다.
‘언제 오는 걸까?’
그 녀석은 이런 약속에 항상 늦는다. 그게 어떤 날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코리안 타임은 그렇게 나쁜 습관이라고 항상 잔소리를 했건만, 나아지는 법은 절대 없다. 항상 멋대로다.
‘뭐 지가 오고 싶으면 오겠지.’
하루 이틀이 아니다 보니 이내 포기한다. 계속해서 따뜻한 커피 잔을 잡고 있어서 손이 조금은 따뜻해졌다. 까페 안은 시끌시끌하다. 오늘 같은 날에는 항상 사람이 많을 수 밖에 없긴 하다. 가방에서 요새 읽고 있는 책을 꺼냈다.
이병률씨의 <끌림>. 그 녀석과 서점에 갔다가 뜬금없이 ‘이 책 되게 좋아.’ 라고 하면서 덥석 사준 책이다. 살짝 훑어 봤었는데, 괜찮은 것 같았다. 하지만 기회가 닿지 않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다가,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그냥 가방에 넣어버렸다. 오늘 같은 날은 왠지 이 책이 어울릴 것 같다. 나는 아이팟을 꺼내 음악을 틀었다. 요새 즐겨 듣고 있는 이루마의 노래들. 랜덤으로 틀었는데 딱 나오는 노래가 좋아하는 <Destiny of Love>다. 랜덤으로 이런 노래가 나오면 기분이 참 좋아진다. 하지만 주위가 너무 시끄러워서 볼륨을 올린 다음 책장을 넘겼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사진도 보고 글도 읽어 나간다. 읽다 보니 이 책 참 괜찮은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파삭하면서도 아릿하고 말랑한 감성이 글에 흘러넘친다. 읽다 보니 한 구절이 눈에 띈다.
‘사랑해라.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잃어온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사랑하고 있을 때만 당신은 비로소 당신이며, 아름다운 사람이다.’
와당탕. 아. 정말. 중요한 순간에 분위기 깨네.
“미안미안. 또 늦었네! 많이 기다렸지?”
알면 좀 일찍 오란 말이다. 이 화상아.
속으로 나는 한 마디 해주고는 겉으로 뾰루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입은 한 발 삐쭉 나오고, 눈썹과 눈은 8자에 눈은 가늘게 뜨고 팔짱까지 끼고 있으니 내가 별로 기분이 안 좋은 것은 누가 봐도 뻔한 일. 나는 아이팟을 끄고 책과 함께 가방에 넣었다. 그동안 뭐라뭐라 주절주절 설명을 하는데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는다. 내가 계속 삐져 있으니 설명을 하다가 잠시 멈춘다.
“야!”
깜짝아.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왜?”
하여튼 뜬금없어.
“계속 그렇게 삐져 있지 말아~ 아잉~”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고 있지만 나름 노력하고 있으니 오늘 같이 기분 좋은 날은 봐줘야할 것 같다.
“......오늘만 봐준다. 그러니 제발 되지도 않는 애교 따위 부리지 마라? 한 번만 더 부리면 때려버릴꺼야.”
“히히. 고마워. 오늘 내가 말이야. 이런 걸 가지고 왔어.”
엥? 왠 꽃?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활짝 핀 백합이다. 두 대에 몇 개씩 달려 있는 하얀 백합들이 나를 향해서 환하게 웃어주고 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예쁘다.”
“그치?”
이 인간이 오늘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아무리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라지만 이렇게 무드 없고 분위기 파악 못하면서, 멋대가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녀석이 이런 좋은 것을 사올 리가 없는데 말이다.
“선물이야.”
“진짜?”
“응. 오늘 중요한 날이잖아.”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이고, 나는 남자친구 따위는 없기 때문에 제일 만만해 빠진 이 녀석을 불러내서 저녁이나 먹고 들어갈 생각이기는 했지만, 이게 이 녀석에게도 중요한 날이었던가? 무슨 말이지? 이해가 잘 안 간다.
“일단 고맙기는 한데, 무슨 일이야?”
“아.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그리고 할 말도 있고.”
엥? 이건 또 무슨 말이지?
“무슨 말?”
“음. 잠시만. 일단 나 밖에 있다 와서 추우니까 커피 한 잔만 시켜서 마시고 말할게.”
꽃만 주고는 대뜸 커피를 사러 가버린다. 나는 그 녀석의 뒤통수를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저 인간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거지?’
생각을 해보지만, 잘 알 수가 없다. 혹시 저 인간이 잘 되가는 여자가 있나? 그래서 나한테 상담을 하려는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대체 뭐지?벼라별 생각이 다 들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내가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그 인간은 커피를 가지고 와서 앉는다. 커피를 손으로 감싸 쥐고 한 입 마시다니 대뜸 이런다.
“아. 따뜻하다. 역시 커피는 아메리카노!”
“야. 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거야?”
커피 한 모금을 마시던 녀석은 순식간에 뿜을 뻔한 표정이 되었다.
“야! 너 나한테 뿜으면 죽는다!”
“아뜨뜨. 혀 델 뻔 했잖아.”
“니가 쓸 데 없는 말 해서 궁금하잖아. 오늘이 뭐가 중요한 날이라는 거야?”
“오늘 일단 크리스마스 이브잖아. 그리고!”
그러고 나서는 갑자기 말을 끊고는 나를 빤히 바라본다.
“뭐...... 뭐야?”
“아. 너 그거 아니? 눈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소통창구래. 그래서 난 꼭 사람이랑 이야기 할 때 꼭 눈을 마주쳐야 해.”
“그거야 너랑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니 잘 알지만 그게 왜?”
녀석은 대화할 때 사람 눈을 바라보는 습관이 있고 그 때문에 가끔은 오해를 받곤 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나 같은 경우야 하도 오래 만난 사이이니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빤히 바라보니 당황스럽다.
“그리고 너 있잖아. 넌 뭘 좋아해?”
“.......너 진짜 이상하다? 니가 내가 뭘 좋아하는지를 모를 리가 없잖아.”
“그럼 나부터 말을 할게. 난 TV를 켜놓고 만화책 보는 시간이랑, 친구가 사준 창가 화분에서 떨어진 잎사귀들을 주워 유리컵에 담아두는 일이랑, 음. 그냥 가만히 있는 시간을 좋아해. 너무너무 좋아해.”
잠깐. 이거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다. 혹시?
나는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어서 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서둘러서 페이지를 찾아본다. 앞부분에 <시간을 달라> 챕터를 살펴보니 이 말이 있다. 위에 무슨 말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윗부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 시간을 송두리째 나에게 내줄 수 있냐는 거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내준 그 시간 동안 당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겠냐는 거다. 당신이 시간을 사용하는 것처럼 늘 익숙하고 늘 당당한 것이 아니라 조금은 애절하고 조금은 울컥하는, 그 무엇이었으면 하는 거다.’
아래부분에는 또 이렇게 적혀 있다.
‘어떻게 시작하는지 모른다면 나는 당신에게 그 방법을 알려줄 수도 있다. 나와 사랑을 시작할 거라면 그냥 나에게 이렇게 말 붙이면 되는거다.’
나는 놀라서 책을 보던 시선을 거두고 그 녀석을 바라보았다. 정말 간만에 보는 진지한 눈빛이다.
“무슨 말 하는 건지 알겠지? 그러니 나에게 너를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을 줄래?”
녀석은 손을 뻗어서 책을 잡고 있는 내 손을 잡아서 자기 쪽으로 이끌었다. 그러면서 손을 꼬옥 잡아준다. 갑자기 주위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음이 사라지며 그 녀석의 목소리만 내 귀에 들어온다.
“역시 손이 차네. 넌 날씨가 조금만 추워져도 금새 손이 차가워지더라. 이제 내가 너의 손을 따뜻하게 해 주고 싶은데. 어때?”
아......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인거지? 너무 당황스럽다. 나는 잠시 멍해져서 이게 무슨 일인지 생각해본다. 이건 대체 뭘까?
까페는 여전히 조용하기만 하다. 그 녀석이 살짝 미소 지으면서, 내 손을 꼬옥 잡고 그렇게 가만히 있는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온다. 이 녀석은 손이 항상 따뜻한 사람이기는 했다. 가끔씩 손이 스칠 때면 따스함을 느낄 수 있기는 했는데, 이렇게 오래 따스함을 느끼는 건 처음이다. 아. 따뜻하다.
“아. 눈 온다. 저기 봐. 눈이야.”
그 녀석의 목소리만 들려오다가 갑자기 까페의 소음이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 창 밖으로 눈을 돌리니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약간 어두운 회색의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눈이 내리고 있다.
“오랜만에 화이트 크리스마스네.”
“그러게. 좋다.”
녀석은 나의 손을 계속 꼭 잡아주고 있다. 따스함이 손을 거쳐서 가슴까지 전해져온다. 나는 손을 잡은 채 그 녀석을 향해 웃어주었다. 따스한 느낌이다. 그리고는 눈을 마주쳤다. 왠지 모르지만 우리는 동시에 창 밖을 바라보았다. 손은 그대로 맞잡은 채. 창 밖에는 눈이 조금 더 펑펑 쏟아지고 있고, 거리에는 조금씩 눈이 쌓여가고 있다. 우리는 잠시 동안 말이 없이 그렇게 앉아있었다.
II.
오늘 드디어 고백을 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같이 눈이 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해주고 싶다. 그리고 나의 마음도 그만큼 따뜻해지기를.
III.
12월의 테마는 크리스마스다. 12월이 시작하면서부터 캐롤을 틀기 시작해서 25일이 끝나는 그날까지 캐롤을 틀어댄다. 예수님이 태어난 날이라는 종교적인 의미도 분명히 있는 날이지만,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축제일 같은 날로 바뀐지 오래인 것 같다. 성인(聖人)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의미 말고도 단지 연인들만을 위한 날이 된지도 오래다.
캐롤도 가끔씩 들어야 좋은 것이지, 한 달 내내 들으니 지겹기 그지 없다. 오늘 같은 크리스마스 이브 날은 사실 거리에 나오고 싶지 않다. 나는 사람이 많은 거리가 싫다. 이 거리에서 나는 혼자다. 다른 사람과 같이 있건 없건 상관이 없다. 아니,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과 같이 있을 때면 더 혼자인 듯 느껴진다.
사람이 많은 거리를 싫어하는 데 어찌해서 나와 있는지는 나도 의문이다. 무언가를 사기에도, 거리를 걷기에도 불편한 날인데 말이다. 옷을 두텁게 챙겨있고 나왔지만, 날씨가 추워서 몸은 절로 움츠러든다. 언 몸을 녹이기 위해 편의점에 가서 따스한 캔커피를 하나 산다. 연신 손을 녹여대지만, 쉽게 온기가 전해지지 않는다. 아무런 약속이 없는데도 그냥 거리에 나왔다.
거리에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나와 같은 국적을 가지고 같은 서울에 산다는 것 외에는 그다지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거리는 넓고 사람은 많지만, 나와 관계있는 사람은 없다. 나는 그냥 혼자일 따름이다.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섰다.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매고 있다. 주위에 연인들은 서로 간에 사랑을 속삭이고, 혼자인 사람들은 어디론가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신호가 바뀌어서 길을 건넌다. 사람들이 와글와글 발걸음을 옮기고 있고,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진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눈이 내리고 있다.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기는 하지만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겨울이 많이 따뜻해져서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기 참 힘들었는데 정말 오랜만이다. 걸어가는 앞쪽 건물에 사람들이 많이 앉아있다. 커피 전문점 창가에 사람들이 앉아 있다.
그 중 한 명이 내 시선을 잡는다. 남자가 여자의 손을 꼭 잡고 있는데, 누군지 잘 모르겠다. 눈에 익은 것을 보니 누군지 내가 아는 사람 같기는 한데,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나와 굉장히 가까웠던 사람인 것 같은데. 누구더라? 길을 건너다 말고 도로 가운데 버스 정류장에 서서 생각을 계속 해본다. 가방을 뒤져서 수첩도 찾아보고 핸드폰 전화번호부도 뒤져보지만 누군지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의 손을 붙잡고, 무언가를 얘기하는 것 같다. 여자의 표정이 뭔가 복잡하면서 미묘해 보인다.
‘누구지?’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안타깝다. 하지만 얼굴이 생각 안 나는데 어쩌겠는가. 예전 일들이 이따금씩 생각나질 않는다. 도저히 기억이 안 난다. 어쩔 수 없다. 나는 계속 그 여자를 보면서 걸음을 옮겼다. 사실 오늘 이 거리에 나온 것도 무언가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메모를 해놨어야 하는 건데.
두 사람은 계속 손을 꼭 맞잡고 있다. 따스한 느낌이 든다. 뭐, 그래봐야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거리에 왜 나와 있는지 잊어먹었지만, 잠시 산책이나 더 해야겠다.
IV.
손을 잡고 바깥을 바라보다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이다.
‘잘 지내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눈이 마주쳤지만, 내가 누군지 못 알아보는 것 같다.
‘당신도 행복해요. 난 당신이 원하던 대로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V.
하늘에서 눈이 더욱 쏟아지기 시작한다. 눈이 내려서 날씨가 포근하다. 캐롤이 온 거리에 울려 퍼진다. 사람들은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고, 거리엔 사랑이 넘치고 있다.















천하 제패를 꿈꾼 한반도 최초의 여제, 선덕여왕




